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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밖에 없네, 김지연, 정소연, 정세랑, 조우리, 조해진, 천희란, 한정현

jhy_2023 2024. 12. 2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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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밖에 없네
시리즈다. 2018년 고전을 퀴어 서사로 풀어 낸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2019년 다양한 이력의 작가들이 참여해 문학의 장르적 재미와 고유한 색채를 느낄 수 있는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을 출간했다.? 2020년 《언니밖에 없네》는 ‘큐큐퀴어단편선’의 세 번째 책으로 한국문학의 현재이자 미래인 김지연, 정소연, 정세랑, 조우리, 조해진, 천희란, 한정현 작가가 참여했다. ?여성 작가로 구성된 이번 작품집에는 각자의 삶을 지탱하며 서로의 곁을
저자
김지연, 정세랑, 정소연, 조우리, 조해진, 천희란
출판
큐큐(QQ)
출판일
2020.09.16

그리고 분명히 해야 할 것.
엘리제는 숨지 않았다.
거기에 있었고, 계속 거기에 있다.
엘리제의 방식으로.
엘리제로.

언니밖에 없네 중에서
“계속 동굴에 숨어 있을 필요가 있나요. 엘리제를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요. ‘우리 편’이 많아지면 좋잖아요.”
페페는 대꾸할 말을 쉽게 찾지 못했다. 엘리제가 동굴이었나.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 엘리제는 동굴이었다. 고립을 자처하며 찾아온 사람들이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같은 어둠에 잠긴 사람들끼리 무방비하게 체온을 나눴다.
안전하다는 느낌 속에서. 안전? 그건 무엇으로부터의 안전이었을까. 혐오로부터? 폭력으로부터? 다만 그것들로부터? 페페는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의 생각들이 점점 더 엉키기만 할 뿐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언니밖에 없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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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페는 엘리제를 동굴이라고 표현했던 혜주의 말을 떠올렸다.
페페도 그 표현에 공감했었다. 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혜주가 말하는 동굴은 언젠가 빠져나와야 할, 어쩔 수 없이 들어간 피난처를 표현한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페페가 말하고 싶은 동굴은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숨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냥, 좋아서, 모여 있고 싶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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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결심이 섰다. 새해가 코앞이었다. 뭐든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적당한 때였다. 티브이 앞에 나란히 앉아 <도전 1000곡> 같은 프로를 보며 고사리를 다듬던 중이었다. 실은 1년 사귄 여자친구가 있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가 내 베스트프렌드라고 알고 있는 대학 동기, 사실은 애인이라고. 여건이 되면 걔랑 같이 살겠다고 쉬지 않고 말했다. 엄마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며 아직 반도 채 못 다듬은 고사리가 든 소쿠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나는 미처 소쿠리에 던져 넣지 못한 고사리 한 가닥을 들고서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조몰락거려서 고사리는 다 짓물러져버렸는데 엄마는 뭘 하는지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틀어놓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게 벌써 5년 가까이 된다. 다시 그 이야기를 하게 될 일은 없었다. 엄마는 그날의 대화를 기억 속에서 삭제해버린 듯했다. 그 비슷한 언급을 하는 것조차 피했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마음에 맞는 동성 친구와 함께 사는 건 권장할 만한 일이고 동성 애인과 함께 사는 것은 부정해야 하는 일인가.
“저는요. 소문내고 싶어요. 점심으로 맛있는 우동을 먹어도 소문내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에요. 길 가다 귀여운 고양이를 만나면 소문을 내는 게 인지상정이라고요. 근데 우리 은호 좀 보세요. 얼마나 귀여워요. 아버님도 거기 앉아서 계속 본인 자랑만 하셨잖아요. 뭐 별 대단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저도 동네방네 소문내고 자랑하고 싶어요. 동네 사람들 다 모아놓고 잔치라도 열었으면 한다고요. 다들 그렇게 하면서 살잖아요. 근데 저희가 남들은 다 하는 그 잔치 열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어디 광고할 것도 아니고요. 그냥 거짓말 안 하고 살겠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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